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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는 호소하고 정치는 동정한다.

수요일, 12월 24, 2014
경제 정책을 결정하고 성장 동력을 모색하는 활동이 정치의 일부가 되기도 하지만 소수자를 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하여 사회 안전을 보장하는 것도 정치의 몫이다. 국가와 정부, 즉 체계는 그 주권을 가진 국민을 보호하고 편의를 도모할 의무를 가지기 때문이다.

소수자에는 경제적인 경우와 비경제적인, 즉 심리적, 관념적인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급격한 경제 흐름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 예를 들어 저축은행 피해자나 투기 피해자 등이 있을 것이고, 후자는 국적과 인종이 다른 외국인이나 다문화 가정, 성소수자가 대표적이다. 장애인의 경우 사회적 편견과 더불어 경제적 어려움까지 받게 되므로 두 가지 모두 해당된다.

더욱 세세하게 살펴보면, 자본주의와 사무직, 기업의 체계화, 위계화로 인해 상사의 불합리한 행동과 책임전가에 피해받는 말단 직원과, 비효율, 비실용적인 교육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국의 학생들(요즘은 어린이들까지 포함된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국민 전체 등 당장 우리 주변을 훑어봐도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들 천지다.

소수자가 수적으로 소수여서 소수자인 것은 아니며, 한편 이들이 과연 소수자일까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관점에서 필자는 을이 갑에게 받는 처우가 위계에 따른 폭력이라고 보기에 말단 직원이 소수자라고 보는 것이고, 한국의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한 문제 제기가 지속되고 있으며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고통스럽다는 것이 학생 당사자와 전문가들의 공공연한 의견이기 때문에 학생들을 소수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바뀌는 시류에 맞춰 장시간 노동이 아닌 창의적 아이디어와 협업, 국민 내수 강화가 필요하기에 한국 국민을 소수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필자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항상 경제적, 상식적 논거를 붙여 누구나 납득할 만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소수자들, 혹은 그들을 돕는 이들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출하고 있을까? 작게는 친구나 지인, 가족에게 불평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당장 대학 학비가 부족해 알바를 하는 것이 고단하고 박탈감이 느껴지며 등록금이 과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여러 창구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이들의 표현의 근본은 사실 자신이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우며 근심스럽다는 것, 즉 불안과 고통이다. 사람들은 이 표현을 다양한 양식 혹은 방식으로 포장하여 타인에게 제시하는데, 전문가들은 양복을 입고 매체에서 차분한, 확실한, 혹은 격앙된 어조로 지식과 주장을 설파하며, 일반인들은 그 성격만큼이나 다양하게 표출한다. 현실에 분노하며 다소 극단적으로 혁명, 강력한 실천을 요구하기도 하고, 염세적, 자포자기 태도로 불특정 다수에게 반감을 드러내기도 하며(묻지마 살인도 이것의 일환일 수 있다.),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공감을 얻으려 하기도 할 것이다. 그 다양성은 필연 삶의 복잡성만큼 거대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것들을 각각 곱씹어보면 근본은 같다. 이들은 모두 힘들다.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인 경우가 많다. 악플러들도 사실 자신의 정신적 결함으로 인해 그런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소수자는 호소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표현을 가공해서 사회적으로 소통이 잘 이뤄질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살다보면 우리는 말을 예쁘게 하는 법, 상처주지 않고 돌려 말하는 법, 예의있게 말하는 법 등 배려하는 법을 은연 중에 학습한다. 이것은 미묘하고 사소하며, 일상에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전파하기 어려운 편이지만, 그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우리는 대부분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그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선의 여지가 충분하다. 가공된 말하기를 통해 더 나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앞으로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하게 될 것이다. 기본적인 역지사지 정신이다. 우리는 커가면서 어린이처럼 자기중심적, 이기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을 피하고 배려를 하게 된다. 분명 그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을 아무리 정제해서 하더라도 들어주는 이가 없으면 소용없다. 듣고 동정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소수자를 사회에 포용할 변화, 정치의 기반이 된다. 소수자는 대개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 철저히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한다면 이들의 의견은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배제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자신, 혹은 소중한 사람도 언젠간 소수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입각해 동정과 포용을 할 수 있다. 요컨대 동정은 소수자의 고통을 보듬어줄 정치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 인간 본연의 동정과 이타심이 잘 작동하지 않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첫째 원인이 이타심의 근본인 배려와 공존에 대한 사회적 학습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제시했듯 소수자는 경제적인 경우와 비경제적인 경우가 있는데, 경제적인경우에는 보통 사회적 비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비용을 둘러싸고 이것을 지불할지 논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데, 사회가 발전해오면서 이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늘어났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현실적으로 저울질을 해야한다. 그러나 비경제적인 경우는 사실상 진보적인 생각을 믿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경제적인 경우 중에서도 당장 비용은 들지만 장기적으로 나아지는 경우, 심지어 오히려 비용이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서로 파이를 더 크게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게임과 투쟁이라기보다는 개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소수자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앞의 두 가지 경우를 혼동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이타적인 행동이나 합리적인 것이 더 나은 것이라기보다는 파이 게임같이 서로 자기 몫을 차지하려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부동산 버블을 우려하는 것이 집을 매수하는 이들의 투정일까, 아니면 미래의 경제적 충격을 방지하려는 합리적인 주장일까? 무상급식의 복잡한 메커니즘에 대해 토론하지 않고 그저 세금 퍼주기, 포퓰리즘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과연 논리적인가? 이 현상으로 인해 정치 혐오증이 발생하고 사회는 이타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한마디로 남 위해서 살아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모두가 자신만을 챙기는 사회는 분명 삭막한 사회이다.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불평등은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세습 자본주의를 심화한다는 논의가 현대에 들어서서 굉장히 활발하다. 2014년 화제가 된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은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만들어내는 불평등의 경향을 다루었다. 이전에도 세계화와 환경 제국주의 등 수많은 폐해가 지적되어 왔다. 소수자에 대한 작고 큰 폭력은 분명 인류 사회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이다.

둘째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그로 인한 심적 고통이다. 누군가가 정말로 망한 사회는 모두가 가난한 사회가 아니라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라고 했는데 공감한다. 빈부격차는 불평등과 차별, 위계화, 폭력의 대표적인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나, 경제는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자신을 챙기기도 바쁘고 스트레스가 극심하기 때문에 더욱 남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어진다.

셋째 원인은 심리적인 회피다. 대중 음악같은 예술 분야에서 흔히 느낄 수 있듯, 대중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속성을 가졌다. 크게는 대규모 공연이나 행사에서 작게는 유흥, 컴퓨터 게임 등 신나고 화려한 것에 마음을 사로잡히며, 우리는 고의적인 회피든 아니면 신경을 덜 쓰는 것이든 부정적인 것,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직시하기 힘들어한다. 또한 타인의 어려움을 공감하려면 지식과 경험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스스로 타인을 보듬어줄 수 있도록 자신의 아픔을 감내하는 것도 필요하다. 타인을 돕다가 정신적으로 크게 고통받아 오히려 우울증에 걸리고 일을 그만두는 심리치료사가 많다. 이러한 개인적인 역량 외에 앞서 언급한 사회적, 경제적 외부 원인도 작용한다.

특히 한국은 OECD에서 행복 지수가 최하위권으로, 국민의 심리적인 고통이 상당히 크다. IMF 이후 급격히 치솟은 자살률, 비정규직 급증으로 인한 고용불안과 취업난 등 경제적인 면은 물론 여성, 비이성애자를 비롯한 각종 소수자에 대한 다소 뒤쳐진 의식, 사회 집단 간의 불화와 증오 등이 뒤섞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을 동정하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분석하여 반성하고 개선함으로써 앞으로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소수자와 정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길 희망한다. 정제된 표현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소통을 도모하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통해 좋은 사회를 건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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